말과 물의 환영(幻影)

김지승

“(…) 삶은 이 말할 수 없는 순간이다. 
 사건 그 자체보다 큰 순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계절답지 않게 춥고 환한 날이다. 방 한가운데에 가방을 활짝 열어두고 무언가를 넣거나 빼기를 반복하고 있다. 지난밤 살해당한 여자의 몸을 운반하던 영화 속 수트케이스가 같은 색이었다는 게 떠올랐지만 한쪽 구석에 무지개 스티커를 붙이는 걸로 충분하다. 바람이 실어 나르는 게 많은 곳이다. 너무 가벼워서는 안 된다. 무거워서도 안 된다. 아주 오래된 것도 새것도 제외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아구아 비바』가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무게를 측정할 수 없는 “살아 있는 물”. 언제나 새것이면서 역사성이 흐르는 물의 순간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 역시 너무 가볍거나 무겁지 않게. 

이름에 ‘ㅇ’을 두 개 가지고 있어서 그는 내 메모에 ㅇㅇ으로 기록되어 있다. 처음 ㅇㅇ의 메일을 받은 날, 나는 병원에서 또 다른 진단명의 가능성을 듣고 추가 검사를 하고 세 시간씩 오후와 저녁 두 번의 강의를 마친 후 늦은 저녁을 먹고 깜빡 잠들어 꿈을 꿨다. 발끝부터 액체에 녹아 몸이 전부 사라지는 꿈이었다. 젖은 소멸에 고통은 없었다. 아드리아마이신, 엔독산주, 탁소텔… 몸을 녹인 액체들의 이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름을 알면 아프지 않다. 몸 안으로 들어왔던 그것들이 몸 밖에서 몸을 녹였다. 안팎의 전환에 어떤 기억이 창백해졌다. 액체가 꿈틀거렸다. 녹아 사라진 줄 알았던 몸이 그 속에서 젤리처럼 투명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건 내가 아니다, 거듭 확신하며 꿈에서 나왔다. ㅇㅇ이 보낸 ‘섬 안의 섬’으로의 초대 메일 속 글자들이 물방울처럼 침대 위로 뚝뚝 떨어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가령, 자기 경험을 해석하기 위해서 다른 여성의 경험에 의지해야 한다든가. ㅇㅇ에게 답장을 썼다. 초대 고맙습니다. 

아직 가져갈 것을 다 결정하지 못했다. 가방이 자기 몸을 활짝 열고 시간을 삼켰다 뱉어냈다. 시간이 흘렀다, 라고 써도 될텐데 쓰고 나면 정말 그런가 시계를 보면서도 의심하곤 한다. 시간이 균일한 방향성을 가지고 일정하게 운동하고 있다는 걸 매번 믿기 어렵다. 틈입하거나 절룩거리거나 잠기는 시간이 아니고, 누출되거나 미혹되는 시간도 아니고, 0에서 9까지 타고 흐르는 시간에 관해서 나는 잘 모른다. 유아가 시간을 측정할 수 있으려면 좌절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K 교수가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단박에 이해했다. 말하자면 생애 첫 대상인 엄마의 가슴이 자기 곁에 있을 때와 부재할 때의 간격으로 우리는 처음 시간을 인식한다. 첫 대상이 오고 가는 사이, 부재로 느끼는 좌절의 감각이 곧 시간일지 모른다. 몇 년 전 만난 부산 영도 해녀들 중 상군 해녀 하나가 “물이 오고감이 물때”라고 해삼을 탁, 소리나게 반토막내며 말했던 게 떠올랐다. 오고 가는 사이, 파도가 평평해지는 순간, 들숨과 날숨이 교차되는 찰나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그런 것이다. 이번에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은 ㅇㅇ가 살고 있는 제주 한 바닷가 마을의 해녀들이었다. 물의 시간을 살며 멀리 갔다 온 언어를 쓰는 사람들.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출렁거렸다. 엘렌 식수의 『제3의 몸』을 마지막으로 넣고 수트케이스를 닫았다. 이 가방이 불능의 몸을 운반할 것이다. 섬까지 내 몸을 운반하는 문제 외의 문제들은 섬에 있었다. 내가 가는 것인데 그들이 오는 것 같다. 비행기 안에서 곧 내게 밀려올 것들을 적는다. 그것들을 파도라 하자.

파도 1. 
그동안 공공 기관과 협업해 진행한 프로젝트는 주관하는 곳에서 주로 모객부터 행사 전반을 세팅하고 내 역할이 주어졌다. 그와 달리 이번 프로젝트는 해녀들의 참여 여부 자체가 공적 약속으로 묶기 어려웠다. 그들을 움직이는 건 물때다. 대화 장소로 그들을 오게 하고, 한두 시간 몸과 마음을 붙잡아 두는 게 과연 가능할 것인가. 나는 물이 아니다(굴, 술, 줄도 아니지)

파도 2.
제주해녀축제를 앞두고 부스에서 판매할 해산물을 채집하기 위한 물질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날씨와 물때가 맞아야 가능한 물질이지만 날씨도 물때도 예측할 수 없으니 결국 그들의 약속은 그때 보고, 두고 보고, 가서 보고 식이다. 어쩌면 그들과 마주앉아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할지 모른다. 헛걸음을 좋아하는 편이어도 정말 그렇게 되면 아쉬울 것 같다. 그들에게 맡겨놓은 말이 있는 것도 아닌데. 

파도 3.
불편한 기류를 감수하고 어찌어찌 그들과 전시 공간에서 만난다고 해도 첫 만남에 서로의 언어에 선뜻 매달리거나 언어의 유동성을 경험하지는 못할 터였다. 더구나 ㅇㅇ와 해녀들의 삶은 연결되어 있다. “섬 속의 섬”이라는 관계. 육지로 돌아오면 그만인 섬 밖의 사람인 나는 조심하는 마음이 계속 커진다. 감정의 여파를 그곳에 사는 ㅇㅇ이 혼자 감당하게 할 수는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좀체 자리가 잡히지 않는 마음으로 은밀하게 나는 ㅇㅇ와 그들을 생각한다. 몸이 텅 비면서 꼭 태왁이 된 것 같다. 

비행기를 타기 전 ㅇㅇ와 이런 걱정을 공유했다. 그간 진행해 온 여성노인들과의 여러 작업들을 염두에 둔 초대였으나 이전 작업 조건과는 사뭇 달라 난감하면서도 이런저런 궁리를 함께하며 약간의 기대와 흥분이 더해지기도 했다. 프로젝트에 노인 참여자들을 고려할 경우 무엇보다 그들의 자의적이고 창발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그런 면이 전제되지 않으면 자칫 기획자나 아티스트의 욕망에 그들을 교묘하게 동원하는 게 된다. 자신들을 향한, 부쩍 달라진 호명의 빈도와 구획되는 의미를 막연하게나마 직감한 해녀들이 외부인에게 경계심을 높이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팍팍한 생계에, 아픈 몸에, 소외에 관심이 없던 세상이 갑자기 그들을 향해 카메라와 마이크를 앞장 세워 자본이 되어 달라 요구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그런 접근과는 달라야겠다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과 ㅇㅇ이 잘 분리되지 않았다. 물이 물을 껴안는 것처럼 해녀들의 삶은 이미 ㅇㅇ의 삶이기도 했다. 

 

그냥 어떻게 되는지 볼까요?
그래요. 가서 기다려보죠. 

창밖으로 구름이 지나고 있다. 사라지고 있는 존재만이 사라진 존재를 기억한다. 내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순간마다 그들이 여전히 죽어 있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나에게 결여된 것들이 저 구름 같다는 생각을 이륙하고 10분이 지나고부터 하고 있다. 사라진 것들은 다 어디로 가나 할 때 저기 있다고 믿고 싶다는 생각. 확신 없는 영원성을 뭉치거나 풀어헤치면 구름이겠거니 하는 생각. 그러니까 무언가 어딘가 있다 치고, 없다 치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했던 순간들이 함께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공항에서 택시기사에게 가방을 트렁크에 좀 실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제가 무거운 걸 못 들어서… 림프절 절단으로 팔을 잘 못 쓴다고 설명할 여유는 없었다. 기사는 차에서 내려 묵묵히 트렁크에 가방을 실었다. 내릴 때도 귀찮은 내색 없이 가방을 꺼내 내 가까이 놓아주며 말했다. 집사람이 아파봐서 잘 알아요. 무심코 다행이네요, 라고 할 뻔했다.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죽어, 라고 한 해녀가 말했다. 옆에서 다른 젊은 해녀가 중얼거렸다. 물에서 못 나와도 죽지. ㅇㅇ에게 이 짧은 대화를 전하고 싶었다. 세 번째인가. ㅇㅇ는 무엇이든 같이 도모할 수 있겠다 싶은, 개방성의 이미지가 강한 사람이다. 그가 안내하는 대로 고이화 해녀의 생가였던 곳에 짐을 풀고 준비해준 톳김밥을 먹었다. 오전에 해녀들이 물질을 했다는 말에 내 몸이 발끝부터 반응했다. 당황스러웠다. 바람일까, 공기 중의 물일까. 그들의 피로감이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내게 전달되었다. 오늘 안 되면 내일도 있으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고 서로 웃었지만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ㅇㅇ 몸의 표정은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물 가까이에서는 감정의 전도율이 높아진다. 미미하게 발산되는 몸의 기억, 감정을 읽자니 내일도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진 않았다. ㅇㅇ에게 보낸 짧은 소개글이 예언이 된 것 같았다. 

이 짜고 축축한 여성들은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 와서 웃을 수도 있고,  돌아서며 찡그릴 수도 있다. 과격하거나 잔잔할 수도 있다. 지쳤을 수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정확한 시간, 장소, 의도에 그들은 초대되지 않는다. 그건 마치 물을 가두려는 시도. 다만 조심조심 찰랑이며 기다릴 것이다. 말이 물이 되거나 물이 말이 될 수 있을까 하며. 

바다 가까이에 있다는 전시 공간으로 나갔다. 바다가 보이지 않아도 거기 그냥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척이 진하다. ㅇㅇ는 평소 물질 도구를 보관하는 한 해녀의 창고를 금채기에 빌려 전시 공간으로 사용 중이었다. 궁금했던 작가들의 작품과 ㅇㅇ의 영상 작업, <내가 헤엄치는 이유> 앞에서 잠깐 걱정을 잊었다. 영상에는 물색과 하늘색이 가득했다. 그 앞에서 누출되는 시간을 느꼈다. 전시 공간의 검은 돌 주변으로 바람과 냄새가 들락거렸다.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이어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관여하는 방식으로 전시장의 작품들은 물빛의 연속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바다처럼 그들도 저기 어딘가 있을 것이다. 손에 연필을 쥐는 일 자체가 어색하고 불편한 이들의 언어와 연결해 볼 다양한 상상적 도구들을 고심하고 밤새워 준비해왔으면서도 어쩐지 나는 그들이 이곳에 와서 내가 기획하고 가리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걸 정말 원하지는 않고 있었다. 물빛 연속체에 둘러싸여 있자니 알 것 같았다. 마음에서 한 문장이 부풀었다. 당신들의 목소리가 크고 카랑한 곳에서 만나야 한다. ㅇㅇ와 나는 (그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잠깐: 다른 질서가 지배하고 있다. 물이라는 몸. 

고전적 질서의 관점에서 보면 무질서하다고도 할 수 있다. 『아구아 비바』에 대해 엘렌 식수가 쓴 문장도 비슷하다. 우리는 그 몸을 다시 무질서하게 쓸 수 있다. 신은 물의 언어에 속하지만 그 언어는 신에게 이름을 주지 않는다. 오직 물의 몸을 가진 여자를 단 한 번 부른다. 한 번만. 그 한 번이 계속 돌아온다. 여자에서 여자들로. 

섬의 높은 습도를 느끼며 몸의 구멍들을 조금 닫아둔다. 그렇게 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진짜로 하는 일은 해녀들의 제주 방언에 귀 기울이기. ㅇㅇ와 나를 연신 의식하면서 자기들끼리만 말을 주고받는 그들의 몸은 열린 듯 닫혀있다. 섬에 도착한 지 고작 서너 시간, 습기 때문에 몸의 경계가 흐물흐물해진다. 둥그렇게 둘러앉은 해녀들 틈에서 조용히 녹아내려도 이상할 게 없겠다. 그때 그 꿈처럼. 병실에서 몸의 윤곽이 지워지려 할 때마다 내가 아는 가장 생생한 검은색으로 만들어진 해녀의 고무옷을 떠올리곤 했다. 검은 옷을 벗은 해녀들 사이에서 실수로라도 말이 내 쪽으로 새거나 흐를까 기다린다. 물을 많이 마셔야 해요. 얼마나요? 약이 소변으로 다 빠져야 하니까 계속 마시도록 하세요. 나는 물을 아주 많이 마셔야 한다, 라고 냉장고 문에 써뒀다. 하지만 얼마나 많이? 가능한 많이. 물에 떠밀려 화장실에 가고, 화장실에서 졸고, 물은 넘치고 잠은 모자라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잠과 잠 밖을 잇는 길이 수관(水管)이 된 것 같았다. 

오줌이 자꾸 마려워 잠을 깨.

자기 전에 물을 많이 마시니까 그렇지.

내 옆에 앉은 해녀와 그 옆의 해녀도 오줌 이야기를 한다. 물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냐고, 옆 해녀가 눈짓을 한다. 대충 알아들었어요, 하고 웃자니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걸음마를 떼고부터 엄마 따라 바다에 들어가서 떠 있다가 가라앉다가 조급히 나아가려 했던 한 소녀는 물속에서 소변을 보는 버릇이 이불까지 따라왔다고 했다. 50대가 된 소녀는 지금도 종종 꿈에서 오줌을 싸고 이불을 숨긴다고 했다. 쉬- 꿈에서도 입으로 그러고 있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ㅇㅇ와 눈이 마주치자 입이 마른다. ㅇㅇ가 물질을 배우고 해녀가 되려는 걸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저들 중에? 나는 서툴게 살피고 그들은 노련하게 감춘다. 경계심을 낮게 깔아둔 시선과 나를 피해 서로에게만 닿는 꼬장꼬장한 말투에 몸이 밀리고 눌린다. 귀만 겨우 열어놓고 있다. 외국어나 다름없는 문장 속에서 짧은 하나를 건져 올린다. 
고랑은 몰라 마씀. 
의미는 나중에야 도착한다. 말로 해서는 몰라.

준비해온 대화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회관에 들어서는 순간 다 잊어버렸다. 얼마간 초조하던 마음이, 쩔쩔매던 두 손이 어느 시점부터는 평온해졌다. 서서히 그런 생각도 들었다. 초조하고 쩔쩔매는 이는 늙은 해녀들이 아니라 나여야 한다. 그들이 경계심을 쉽게 풀어주지 않아서, 섬과 섬밖의 이들을 차갑게 구분해서, ‘우리’에 나는 없어서 몸을 조심히 물리면서도 뒤따라오는 새로운 관계적 상상과 몸의 위치가 반가웠으니 마음은 물리지 않은 셈이다. 좀체 여지를 주지 않던 그들이 그래도 막다른 곳으로 몰지는 않고 물길 하나 열어주듯 내게 어디에서 왔냐 묻던 그 순간을 시작점으로 삼기로 했다. 물 안에 물이 있는 것처럼 말 안에 말이 산다. 다음에는 그 안에 사는 말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 말로 해서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말 말고 물로. 잠시 ㅇㅇ의 마음에 닿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물질을 배우고 싶어하는 ㅇㅇ. 몸의 말을 배우고 싶어하는 나. 물이든 말이든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어떤 외면과 경계로 출렁거리는 해녀들의 회관에서 정중하게 물러났다. 

잠깐: 결코 대체되지 않으면서 계속 자리를 바꾸는 것은? 

몸이 물에 녹는 꿈속에서 받은 질문의 답을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떠올렸다. 창밖으로 하늘의 것인지 바다의 것인지 모를 파란색이 펼쳐지고 구름이 흐른다. 저 부푼 물의 변신, 하늘의 메두사.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처음 생각했던 물은 부드럽게 오고가는 물이 아니라 거품이 생명처럼 부글거리는, 마찰과 모순적인 운동으로 살아있는 물이었다. 

얼마 후 ㅇㅇ의 SNS에서 그가 검은 고무옷을 입고 해녀들과 바다를 향해 앉아 있는 사진을 봤다. 나도 모르게 낮은 탄성이 샜다. 여전히 얼마간은 불편한 채로 그들의 마음을 살피며 함부로 어떤 때를 결정하지 않으려 애쓰는 ㅇㅇ가 그려지다가 흐릿해졌다. ㅇㅇ는 동그란 두 섬을 닮았다. 거리를 두지 않으면 ♾️가 된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수보다 더 커지고 있는 상태. 우리가 무한대의 물로 다시 만나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거품이 나도록 씻어낼 것이다. 두 개의 동그란 섬과 무한대의 물을 오가며 부글거리는 시간을 창조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에게 대화란. 

말이 계속 계속 커지면 물이 돼요. 거기 몸을 담그고 경계가 녹는 순간에 우리 시작해볼까요? 

김지승 Ji Ji

김지승
여성적 글쓰기와 다양한 여성 서사에 관심을 두고 개인 연구와 여성 대상 예술수업을 진행해왔다. 특히 여성노인의 해학과 촌철살인에 관심이 많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술래 바꾸기』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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